사람과 기술의 소통을 넘어, 사람과 사람의 소통을 위하여

– 경기 부천고 ‘매뉴얼 개발’ 테크니컬 라이팅 특강 후기

1. 매뉴얼 – 사람과 기술의 소통으로 삶을 바꾸게 하다

인류 최초의 매뉴얼은 무엇일까요?
엄마가 아기에게 생존의 기술을 몸짓과 말로 일러 준 것이 바로 매뉴얼의 시초가 아닐까요. “아니 아니, 이렇게…” 또는 “그럼 그럼, 그렇지!”라거나 “밥 먹을 때는 꼭꼭 씹어야지.” 등. 이로부터 매뉴얼은 인간과 자연, 인간과 기술 사이의 관계 변화에 따라 진화를 거듭해 왔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문자 언어로 씌어진 최초의 매뉴얼은 무엇일까요?
이 물음에 대한 답으로서 정설은 아직까지 없습니다. 매뉴얼 분야의 학문이 정립되지 않은 까닭이지요. 여러 가설 중에서 몇 가지를 소개해 드리죠.

▲ Marcus Vitruvius polio, Ten Books on Architecture (B.C. 33-B.C. 22)

초기 형태의 매뉴얼로 거론되는 것으로는 B.C. 1세기 로마의 건축가 비트루비우스(Marcus Vitruvius polio)가 쓴 “건축 10서(Ten Books on Architecture)”가 있습니다. 집 짓기에 좋은 장소와 방법, 계절에 따른 방의 방향 같은 실용적인 기술을 설명한 책입니다. ‘기술을 설명’한 것으로서 요즘 용어로 하면 ‘테크니컬 라이팅’의 원조 격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 Aristotle’s Masterpiece (1684)

매뉴얼의 형식을 좀 더 갖춘 결과물들은 과학기술의 진보와 함께 자연과 인체의 신비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나오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1684년 익명의 저자가 출간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걸작(Aristotle’s Masterpiece)”입니다. 이 책은 고대 그리스의 지식과 당시의 과학 이론을 결합해 성, 임신, 출산 등을 일반인들에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수십 차례 판을 거듭할 만큼 널리 읽혔다고 합니다. 매뉴얼에 근접한 ‘지침서(Guidebook)’들이 유행하는 계기가 된 것으로 평가받습니다.

▲ Joseph Moxon, Mechanick Exercises (1677-1683)

보다 체계적인 매뉴얼로 꼽히는 것은 영국의 인쇄업자 조셉 목슨(Joseph Moxon)이 1677~1683년에 걸쳐 출판한 “기계 실습(Mechanick Exercises)”이란 책입니다. 이 책은 일반인들이 책만을 보고도 새로운 기술을 배울 수 있도록 씌어졌다는 점에서 이전의 저작물들과 차별화됩니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타고난 신분을 벗어날 기회가 열린 17세기 유럽, 누구든 스스로 기술을 배울 경우 오랜 도제교육을 받지 않더라도 자신의 삶을 바꿀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때 “기계 실습”은 그것을 가능케 해 준 최고의 매뉴얼이었던 셈입니다. 사람과 기술의 소통을 통해 누군가의 삶을 바꿀 수 있게 해 주는 매뉴얼. 지금의 시점에서 생각해도 멋지지 않은가요?

2. 경기 부천고 – ‘사이언스 퓰리처’ 프로그램을 만들어 ‘과학 매뉴얼 쓰기 대회’를 개최하다

매뉴얼의 역사는 이처럼 인류의 역사와 함께해 왔지만, 아직까지 매뉴얼 개발과 관련한 정규 교육과정을 개설한 국내 교육기관은 없는 것으로 확인됩니다. 대학의 글쓰기 강의에서도 전체 커리큘럼의 한 부분으로 매뉴얼 방식의 글쓰기를 거론하고 넘어가는 정도에 그칩니다. 산학연계의 중요성을 줄곧 언급들 해 왔지만 매뉴얼 업계의 경우는 예외적인 상황이라 하겠습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고등학교 교육과정에 ‘과학 매뉴얼 쓰기 대회’를 기획해 3년째 이어 온 사례가 있어 크게 주목됩니다.

경기도 부천고등학교의 ‘사이언스 퓰리처(Science Pulitzer)’ 프로그램이 바로 그것입니다.

부천고등학교는 경기도교육청이 지정한 과학중점학교라고 합니다. 사이언스 퓰리처 프로그램의 담당교사인 이진봉 수리과학부장님께서 보내 주신 자료를 그대로 살짝 공개해 드립니다. (개인정보 등이 노출될 우려가 있는 부분만 보이지 않도록 편집했습니다.)

부천고 수리과학부에 의하면 사이언스 퓰리처 프로그램은 과학 매뉴얼을 포함해 다음과 같이 다양한 분야의 글쓰기 대회를 2015년부터 개최해 왔다고 합니다.

– 과학 저널리스트 초청 강연과 그에 이은 과학 기사 쓰기 대회
– 과학 매뉴얼 쓰기 교육과 그에 이은 과학 매뉴얼 쓰기 대회
– 과학 문학가 초청 강연과 그에 따른 과학 문학 쓰기 대회
– 기타 과학 논술 및 에세이 쓰기 대회

사이언스 퓰리처 프로그램을 신청한 학생이 340명이나 되며, 학생들의 만족도 역시 매우 높은 편이라고 합니다. 어떠신지요? 개인적으로는 고등학교 과정에서 해당 교육 프로그램을 경험할 수 있는 학생들이 부럽다고 생각될 만큼 의미 있는 커리큘럼이라고 생각합니다.

3. 한샘EUG – ‘매뉴얼 개발’ 테크니컬 라이팅 특강을 지원하다

부천고등학교의 사례는 매뉴얼, 더 넓게는 테크니컬 커뮤니케이션(TC) 분야에 대한 사회적인 잠재 수요를 잘 보여 준다고 생각합니다. 부천고 수리과학부로부터 매뉴얼 제작 방법에 관한 초청강연 요청이 한샘EUG로 접수되었을 때, 망설일 이유가 없었던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합니다. 물론 TC 분야의 전문성을 높이고 사회적 인식을 넓히기 위해 한샘EUG가 그동안 진행해 온 활동의 연장선이기도 합니다.

▲ ‘매뉴얼 개발’ 테크니컬 라이팅 특강 (2017.7.14, 부천고 면학재)

부천고의 ‘과학 매뉴얼 쓰기 대회’를 지원하기 위한 ‘테크니컬 라이팅 ― 매뉴얼 개발’ 특강은 지난 7월 14일(금요일) 저녁 7시부터 90분간 부천고 도서관 ‘면학재’에서 진행했습니다. 강의는 한샘EUG 이성우 콘텐츠그룹장이 맡았으며, 부천고 재학생 150여 명과 선생님들께서 함께 참석했습니다.

참고로 해당 강의에 사용된 교재의 목차 슬라이드를 공개해 드립니다.

실제 매뉴얼 개발 인력들을 대상으로 한 강의 교재여서 분량이 많고(8시간 강의분) 전문적인 내용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내용을 줄여 버리면 학생들이 매뉴얼 개발의 현장감을 느끼지 못할 듯하여 강의 교재는 가감 없이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그 대신 강의 시간과 학생들의 수준에 맞춰 강의 현장에서 압축적으로 전달했습니다.

학생들의 질문은 예상보다 더 현실적이고 구체적이었습니다. 매뉴얼 하나를 만드는 데 드는 시간과 비용을 비롯해 이번 과학 매뉴얼 쓰기 대회에 적합한 제품 선택까지 물어보더군요. 그만큼 관심과 열의가 대단하다고 느꼈습니다.

4. 매뉴얼 – 사람과 사람의 소통으로 세상을 바꾸다

▲ 사람과 기술의 소통 단계에 머물렀을 때의 역설적인 단절 상황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사람과 기술의 소통을 위해 만들어진 매뉴얼은 사람이 해당 제품을 안전하고 올바르게 사용하기 위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물론 사람 중심의 기술 문명사회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휴머니즘이 밑바탕에 담겨 있겠지요.

그러나 여기서 끝은 아니겠지요. 사람과 기술의 소통 단계를 넘어 궁극적으로는 사람과 사람이 소통하는 세상을 만들어야겠지요. 다시 말해, 사람과 기술의 소통 단계에 머물렀을 때의 역설적인 단절 상황으로부터 벗어난 세상을 만들 수 있는 수준까지 나아가야 하겠지요.

사람과 사람의 소통을 통해 세상을 좀 더 좋은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매뉴얼, 언젠가는 한샘EUG에서 이런 매뉴얼까지 만들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